처음 인식하게 된 계기는 어느 마물과의 싸움에서였었던가. 정확히는 생채기에 스며든 독으로 인해 피를 토하게 만들고, 때로는 제대로 기술을 발휘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어떨 때는 전신을 저리게 만드는 기분 나쁜 촉수에 저항했던 끝에 간신히 승리를 쟁취하고 난 직후였었던 것 같다.
「저기, 정말로 괜찮아?」
「안 괜찮은데 숨기는 건 아니지?」
「휴식이 필요하면 바로 얘기해줘. 겉만 봐서는 잘 모르니까.」
「아무리 네가 과거에 에이스였어도, 이제는 혼자서만 짊어지는 건 안 돼.」
저택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말수가 지극히 적어지곤 하던 작은 지시자가 유독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더랬다. 그 당시의 그녀의 표정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고 느꼈을 테다. 본래 그녀는 감정의 발현이 더딘 편이었다.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감정이 숨어버리는가 하면, 숨기고 싶어 하는 감정이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분명 그 당시에는 후자였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면 평온하던 마음에 잔물결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기, 리즈. 한눈팔지 마.”
“…아아, 그래. 미안.”
“응. 이번에야말로 전부 태워버리자.”
기시감을 불러오는 환경에 잠시나마 상념에 젖었던 감각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마물은 여전히 그 아가리를 탐욕스럽게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회상 속의 걱정 어린 눈빛의 소녀와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등 뒤의 현재의 그녀는 아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붉은 도신의 검 끝에서 튀는 불꽃이 순간 격하게 흔들렸다.
일생을 전장 속에서 보내다보면 일정 수준의 적이라면 다음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정도의 심안心眼이 갖춰진다. 선봉에 나선 리즈 또한 그런 부류의 전사였다. 기세 좋게 대지를 딛고 서 있는 네 발은 지금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리즈 자신에게는 그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그래, 확실히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어중간하게 일렁이는 불꽃의 아지랑이를 간단히 찢어발긴 날카로운 발톱은 그대로 리즈의 어깨마저 덮쳤다.
“크, 윽……!”
“리즈?”
성급하게 나서려는 로셀레를 리즈의 한 손이 제지했다. 지면을 적실만큼 흘린 선혈쯤은 이 세계에서의 전투에 큰 지장이 없다. 마물의 몸통을 크게 베고 강한 세기의 불꽃으로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대가로 몇 번인가 크고 작은 살점들을 내어줘야 했다. 너덜너덜해진 리즈의 몸은 어떻게 가눠 보거나 로셀레와 여타 동료가 돌볼 사이도 없이 제 피로 축축해진 미지근한 지면으로 고꾸라졌다.
“리즈, 괜찮아?”
“이 정도는……별 거 아냐.”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지시자.”
누워있는 리즈의 시점으로는 로셀레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드물게 언성을 높인 것을 감안해서 추측할 뿐이었다. 걱정. 분노. 사념. 안심. 그 어떤 단어로 정의하면 좋을까. 리즈가 다시금 상념에 젖은 동안에 로셀레는 겉주머니에서 약물이 담긴 주사기를 꺼냈다. 탐색을 끝낸다면 순식간에 회복되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지금 당장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의 충동질이 강했던 탓이다. 그녀는 이런 심리를 세간에서는 뭐라고 일컫는지에 대해, 또한 세간에서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해 무지했다. 사실 알아야 할 필요성도 의향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기절하고 싶어도 지독한 고통이 정신을 각성시킨다. 과하게 흘린 혈액이 흠뻑 적신 지면은 마치 눅눅한 욕조 같다. 리즈는 약물이 줄어드는 주사기와 가늘게 떨리는 팔을 힘겹게 주시했다. 로셀레 본인의 말을 조금 빌리자면, 원래 저렇게까지 떨리는 ‘기능’은 없었을 터였다.
“저기, 조금만 참아. 곧 괜찮아질 거야.”
소용돌이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던 마을 사람들. 목숨을 걸고 코어를 회수하며 함께 싸우던 동료들. 『성기사의 힘』을 측정하고 실험하던 여러 엔지니어들. 이런 세계에서나 알게 되었던 까마득한 후배들. 적어도 되찾은 기억들과 성유계에서의 생활에 한해서는, 여태껏 그 누구에게서도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걱정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로셀레 쿼츠라고 자칭하는 지시자를 처음 만났던 순간에 느꼈던 소름은 단순한 기분 나쁜 오한이 아니라 이런 나날을 예견한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사기 바늘이 빠져나가고 남은 팔의 소매가 내려갔다. 흉하게 벌어진 채 붉은 피를 꿀럭꿀럭 뱉어내던 상처들은 어느 새 굳게 다물려있었다. 아무리 이 세계의 환경에 적응했다곤 하더라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별 수 없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 기분이었다. 마물도 인간도 아닌 무언가. 리즈의 손이 힘없이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바라보던 로셀레는 무릎을 꿇고 그의 상체를 바짝 끌어안았다.
“지시자. 다음 지역은 어느 방향이라고 했더라? 저 앞인가?”
“몰라. 안 가르쳐줘. 안 돼. 지금은 무조건 쉬었다가 가.”
“나나 뒤에서 기다리는 다른 녀석들이 어떻게든 지금 가고 싶다고 한다면?”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어깨 부근을 조금 적시고 만 액체는 뜨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로셀레의 체온은 리즈의 체온에 비하면 서늘하기만 하다. 그의 왼팔이 그녀의 등을 쓸었다. 마치 어르고 달래는 투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리즈와 로셀레 그 어느 쪽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리즈의 시선이 스러져가는 마물의 시신에서 맴돌다 곧장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레지멘트 제복(후배들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사라진 후에 디자인이 바뀌었다고 했다.)과 낯익은 목도리가 방금 전까지 흘렸던 피에 젖어가고 있었다. 어느 의미로는 그녀가 자신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일부러 공격을 늦추고 방어를 느슨히 한보람이라면 십분, 아니 십이분 이상 있었다. 저번부터 지금까지 줄곧 비정기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였음에도, 아무래도 질릴 날은 찾아오지 않을 모양이다.
“하는 수 없지. 지시자가 원하는 대로 할까.”
무릇 착각은 지각보다 빠른 법이지만, 광기는 그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완전하게 아물었을 상처자국이 욱신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검붉은 피웅덩이에 비친 리즈의 검붉은 표정은 그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 그. 아무도.
『랜서.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 그녀를 감시해라. 민간인과의 접촉이 잦을 시엔 상황을 봐서 개입하도록.』
『이봐, 코토미네. 그렇게 줄기차게 재명령하지 않아도 된다고. 며칠 내내 시키는 대로 계속 하고 있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냐?』
제 역할을 마친 나무 꼬챙이가 랜서의 손에 의해 무미건조하게 뚝 부러졌다. 정통 마술사 출신은 아니었으며 또한 결코 정상적인 계약의 방식을 취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엿한 마스터인 이상 코토미네 키레이 역시 일단은 제대로 된 염화念話 정도는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까지는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염화의 내용들에 관한 불만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스터와의 계약 자체도 령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찬동은 했을지언정 내면에 쌓인 불만은 여전히 가라앉아있건만 이제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생전의 전사에게 감시역을 떠맡기지 않는가! 랜서는 염화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유의해서 홀로 생각을 곱씹었다. 부디 엿 먹어라, 빌어먹을 마스터.
본의 아닌 감시는 오늘부로 사흘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차피 가짜 수녀의 발자취는 더듬을 필요도 없이 매우 짧고는 했다. 교회에서 묘지를 거쳐 상점가까지. 상점가에서 류도사까지. 류도사에서 다시 상점가까지. 그리고 마지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교회로. 이따끔 딴 길로 새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에는 후유키 시는커녕 키레이의 예상 범주에서도 벗어날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따분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고층 건물 옥상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랜서는 소리 나게 혀를 찼다. 이맘때면 절실하게도 옛날의 목숨 건 전장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니면 잔잔한 수면과 한가로이 드리워진 낚싯대라던가.
“직접 하면 안 되나, 진짜. 이런 좀스런 짓은 못 해먹겠는데.”
랜서의 푸념이 알게 모르게 언어화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만날 일 없을 다홍빛 잔상만이 한껏 부푼 잡념들과 함께 밝은 햇살 속에서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래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의 기세로 영체화하며 랜서가 크게 도약했다.
맛있을 것 같은 음식의 냄새와 더불어 붉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마을의 풍경은 썩 나쁘지 않다. 그늘 진 골목의 구석에 몰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있는 숙녀의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가능한 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문구지만, 그야말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개든 늑대든 상관하지 않고 전부 잡아버리면 그만일 뿐이다. 명령받은 건 감시 뿐이지만 그러하고 가만히 놔두기에는 랜서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빨리. 더 빨리. 영체화에서 실체화까지의 약간의 틈은, 랜서에게 있어서는 답답할 정도로 길었다. 체중을 실어 뛰어 내린 기세 그대로 한 명을 걷어차서 날려버리고, 다른 한 명은 넋을 놓는 사이에 멱살을 잡아서 던지고, 나머지 하나는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했다. 서번트의 신체 능력이란 민간인과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상당한 여유를 두고 천천히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결과가 이 모양이다. 랜서는 여느 짐승들이 물을 털어내는 것처럼 머리를 좌우로 여러 번 흔들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괴롭힌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와우! 클린 히트!”
“이번엔 내가 우연히 지나가서 망정이지.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히 다녀, 달 아가씨.”
서먹하게 이야기하며 돌아서는 랜서에게, 루리는 바닥에 나뒹굴던 나이프를 주워서 던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랜서는 몸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회피했다. 정말이지, 귀엽지도 않은 장난이었다.
“…뭐하는 짓이야?”
“꼭 조심해야 해? 전부 다 아는데도?”
“뭐?”
“다 안다니까? 이런 무리들이 여기 근처에서 가장 잘 꼬인다는 것도, 키레이 아가가 왕자님에게 시킨 것도, 며칠 째 따라오는 것도 전~부. 왕자님, 내게 기척 감지 능력이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나이프가 허무하게 추락하는 소리는 앙칼졌다. 랜서와 루리의 적안이 잠시 그쪽을 쳐다보았지만, 두 서번트의 관심은 거기에서 그쳤다.
“달 아가씨, 혹시 뒤에서 몰래 미행당하는 쪽이 취향?”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이게 재미있으니까?”
“하?”
“잘 들어봐. 내 행동을 의심하고 왕자님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 어차피 키레이 아가는 아무도 믿지 않는걸? 아가가 착실하게 믿는 건 신 정도지 않을까? 그런 청렴한 성직자가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즐거운 거야. 바람 같은 거, 피울 리도 없는데.”
“네, 네. 그래. 어련하시겠어.”
“어쩌면 다른 이유는 다 치우고 그냥 실수로라도 내가 다른 사람 손에 흠집이 나는 게 싫은 걸지도 모르겠네! 그녀를 상처를 입히거나 죽여도 되는 건 나뿐이다, 같은 그런 거~?”
추측에 불과하지만 일리는 있다고, 랜서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긍정을 밖으로 표출한다면, 어쩐지 키레이와 루리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계약을 맺은 이상, 이미 그런 신세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어쩌면 필요 없는 간섭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랜서의 뇌리에서 가능성에 불과했던 추측이, 태평하게 기지개나 켜고 있는 루리의 모습에 확신으로 변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처음부터 찾아볼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정도가 되면 목숨이 몇 개나 되는지 궁금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차피 직접적으로 물어본다 한들 제대로 된 답이 나온 적이 없다. 랜서는 어깨를 으쓱이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을 비웠다.
“아참, 빛의 왕자님은 들은 적 없겠지만, 전에 있었던 성배전쟁에서는 키……키리……어라, 뭐였지? 벌써 잊어버렸네♪ 아무튼 그런 이름의 검은 마술사 킬러한테 아가가 전념하느라 방치 당했었거든. 그러니, 여러 가지 의미로 전념당하는 그 호사를 이제 내가 누려도 되지 않겠어?”
주변이 조용하고 골목이 좁은 만큼 열에 들뜬 혼잣말은 필요 이상으로 크게 울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듣지 않고 바로 사라지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랜서의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이해 불가능의 영역을 표하고 있었다.
루리는 뒷골목에서 빠져나가기 직전에 양산을 펼쳤다. 햇살을 등진 청회색 고양이의 등은, 무방비한 척하는 거미줄과 닮았다.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파란 개는 발끝부터 천천히 모습을 감춰가며, 도저히 뱉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감상을 입에 담았다.
“아~아. 그, 뭐냐……본의든 아니든 일단 큐피드가 된 입장이 할 말은 아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네 방식은 제정신이 아냐. 사지는 멀쩡한데 이건 뭐 정신이 더 병든 거 아냐?”
“그러면 뭐 어때? 당사자인 나와 아가만 즐거우면 그걸로 됐지.”
정신을 잃고 널브러져 있던 한 사내는 할 말을 잃고 진저리 치던 랜서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사족으로 천천히 기었다. 단순히 사냥감을 노리는 하이에나를 흉내 내는 거였다면, 누구나 행위 예술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파란 머리의 남자가 안 보이는 지금이라면 여자의 뒤를 기습하는 것도 가능할 테다. 자신들이 당한 건 어디까지나 방심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고작 한 명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당할 리가 없다.
그렇게, 먼지 쌓이다 못해 고루하기까지 한 전형적인 사고방식에 마음을 기울이며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결국 불시에 날아온 날붙이가 실낱같은 희망로 하여금 무가치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손등에 불이 붙은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럴 만도 했다. 사내가 난생 처음으로 본 물건이 손등과 뼈를 종잇장에 구멍을 내듯 우습게 꿰뚫고 바닥에까지 단단히 박혀있었다. 억지로 움직인 손에서부터 벌어진 상처가 체액을 질질 흘리며 흔적을 남긴다. 아픔으로 인한 비명이 나오는 것보다도 먼저, 빠르게 등에 올라타는 것의 행동이 빨랐다. 머리채를 잡힌 채로 아래로 처박힌다. 몇 번이나. 계속. 강하게. 눈앞이 일그러지며 조명이 꺼지듯 천천히 어두워졌지만 희미한 의식이 사내가 다시 시야를 되찾게끔 도왔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는 일 푼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번에 꼬인 벌레는 셋인가. 이전에 비하면 수가 줄었군. 이게 그녀 나름의 배려라면, 나도 성심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실례겠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라, 청년. 아니면 하필 그녀를 고른 스스로의 운을 탓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어때, 신께 탄원이라도 하겠나? 만약 그럴 거라면 기꺼이 유예시간을 주지. ……뭐, 걱정 마라. 이건 너에게만 주어지는 대우는 아니다. 네 동료들에게도 곧 같은 길을 인도해줄 예정이다.”
흡사 복음을 읊는 듯 중후함이 깔렸지만, 그만큼 어딘가 즐거워하는 기색 또한 엿보이는 목소리였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 나쁜 중압감이 그보다 더욱 불쾌한 오한으로 변모해간다.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귀퉁이 너머에서부터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 아닌지, 사내는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의 와중에도 스스로의 정신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무겁게 짓누르는 거한은 아무런 힌트나 해답도 주지 않았다. 역시 삼류 영화에나 나오는 악당과 현실의 차이라는 거겠지. 사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라도 평소라면 돌아가지 않았을 만큼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곳에는 그저, 역광에 가려진 실루엣 사이에서 마모된 십자가와 어두운 색의 영대, 그리고 맹수의 발톱이나 송곳니 따위를 연상시킬 만큼 첨예하고도 기나긴 세 자루의 칼날만이 유일하게 눈에 띄었다.